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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투자는 예측이 아니라 나를 다스리는 시스템이다

진화와 투자 철학의 DNA 저는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애널리스트도 아니고, 펀드매니저도 아닙니다. 그저 18년 동안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온 평범한 엔지니어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거창한 투자 이론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투자를 배우고 뼈아프게 실패하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었는지를 치열하게 기록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의 저는 그저 오를 만한 개별 종목을 찾았습니다. 더 좋은 기업을 발굴하면 더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쓰라린 시간들이 지나면서 ETF를 만났고, 포트폴리오를 고민했으며, 마침내 자산배분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벼락처럼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고른 ETF가 아니었습니다. 포트폴리오의 비율도 아니었습니다. 투자에서 가장 어렵고 통제하기 힘든 변수는 **시장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시장이 폭락하면 공포에 흔들렸고, 반대로 급등하면 나만 소외될까 봐 조급해졌습니다. 자극적인 뉴스를 볼 때마다 투자 철학이 흔들렸고, 잠시라도 수익률이 나빠지면 제가 세운 원칙마저 의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장은 늘 그렇듯 그 자리에 있었지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변덕스럽게 변하는 것은 언제나 제 자신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투자의 초점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을 사서 얼마를 벌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이 극심한 변동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1. 완벽한 예측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의 설계

오랜 시간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뼛속 깊이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짜 '좋은 시스템'이란, 오류가 단 한 번도 나지 않는 완벽한 시스템이 아닙니다.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그 원인을 꼼꼼히 기록하며, 결국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개선해 나가는 시스템이 진짜 위대한 시스템입니다.

저는 우리의 투자 역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만하게도 시장의 방향을 완벽하게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얄팍한 예측은 언제나 빗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거대한 블랙스완이 덮쳐 시장이 요동칠 때도, 탐욕과 공포로 제 감정이 미친 듯이 흔들릴 때도, 결국은 저를 다시 '차가운 원칙'으로 강제로 되돌려놓는 생존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긴 여정의 제목이 『투자 진화론』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더 복잡하게 바꾸고 더 많이 알아가는 것만이 진화가 아닙니다. 어떤 환경의 변화가 닥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 원칙'과,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유연하게 바꾸어야 할 전술'을 명확히 구분해 내는 것. 그것이 제가 믿는 진정한 의미의 진화입니다.


2. 정답은 없다: 나와 다른 결론에 도달하기를

그렇기에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 글에는 시장을 무조건 이기는 마법의 정답 같은 것은 없습니다. 100% 수익을 보장하는 새로운 투자 비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역사에 남은 훌륭한 투자 대가들은 수십 년 전부터 '장기 투자, 분산 투자, 저비용, 그리고 규칙'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이야기해 왔습니다. 제 생각을 글로 정리하면서 세상에 없던 원리를 새롭게 발견한 것은 단 하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신, 저는 그 위대한 대가들의 원칙들을 **'평범하고 나약한 개인이 어떻게 평생 동안 포기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지'**를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고민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다루던 제가 거친 투자 생태계를 바라보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방식일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글을 읽으신 독자 여러분께서 제 포트폴리오를 맹목적으로 따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투자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시지도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저는 여러분께서 이 여정을 함께하신 뒤, 저의 결론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분만의 완전히 새로운 결론과 철학에 도달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만, 스크롤을 모두 내리고 난 뒤 여러분의 마음에 딱 한 가지 씨앗만은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3. 목적이 이끄는 삶과 Stay the Course

언젠가 누군가가 저에게 "당신은 도대체 왜 그렇게 치열하게 투자하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저는 그저 계좌의 앞자리를 바꾸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 미국 증시의 하루치 손익에 일희일비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위대한 투자자의 **'One Billion Dollar Donation(10억 달러 기부)'**이라는 문장을 보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투자의 끝에서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환원을 꿈꾸고 있는데, 정작 저는 숫자에만 매몰되어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돈을 벌고 있는지' 투자의 진짜 목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10억 달러를 기부하는 위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 든든한 내 집 마련, 노후의 삶을 지켜줄 소박하고 따뜻한 여유, 혹은 돈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유'만으로도 투자의 목적은 이미 차고 넘치게 위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숫자로 찍히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나를 지탱해 줄 투자의 진정한 '목적(Purpose)'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존 보글이 남긴 또 하나의 위대한 문장을 제 투자 인생의 나침반으로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Stay the Course. (항로를 유지하라)"

존 보글이 남긴 이 위대한 문장은 원래 "시장이 흔들려도 절대 팔지 말고 포트폴리오를 우직하게 고수하라"는 의미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문장을 저만의 방식으로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나의 얄팍한 고집이나 맹목적인 믿음을 영원히 고수하라는 뜻이 아니라, 나의 '목적(Purpose)'을 향해 나아가는 큰 항로 자체를 유지하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 큰 항로를 잃지 않는다면, 시장과 뉴스가 만들어내는 얄팍한 감정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되, 내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더 나은 논리가 나타났을 때 언제든 기꺼이 내 낡은 뗏목을 부수고 더 튼튼한 배로 갈아탈 수 있는 진정한 용기. 그것이 진화하는 투자자로서 제가 새롭게 정의한 **'Stay the Course'**입니다.

어쩌면 이 글의 제목은 거창하게도 『투자 진화론』이지만, 지난 여정 속에서 실제로 진화한 것은 제가 선택한 투자법이 아니라, 세상과 돈을 바라보는 저의 사고방식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여정을 모두 마치고 난 뒤, 독자 여러분이 제 투자 시스템을 굳이 기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선택했던 특정 ETF들을 모조리 잊어버리셔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대신, 마지막 책장을 덮는 그 순간 딱 하나의 질문만은 스스로에게 묵직하게 던져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로 시장이 흔들릴 때, 나를 지탱하고 다시 원칙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어 줄 나의 'DNA'는 과연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제 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해답은 오직 여러분 각자의 치열한 삶의 궤적과 경험 속에서만 스스로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스스로 찾아내기 위해 고민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비로소 **독자 여러분만의 위대한 『투자 진화론』**이 시작될 것입니다.


4. 에필로그가 11장이 아닌 99장인 이유: 끝나지 않는 진화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10장으로 마무리된 1부의 끝에 11장이 아닌 99장이라는 번호를 붙였습니다.

생물학에서 진화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선택압(Selection Pressure)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존'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저의 투자 진화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26년 현재, 저는 과거의 뼈아픈 실패와 현재의 시장 환경에 적응하여 10장까지의 시스템으로 저만의 '1차 커밋(Commit)'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시장이라는 거대한 자연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할 것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블랙스완이 덮쳐오고,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더 나은 생각과 위대한 이론이 세상에 발현된다면, 저는 주저 없이 그것을 흡수하여 다시 한번 저의 시스템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진화의 섭리 속에서 생명체들이 자손을 만들어 후세에 DNA를 남기듯, 저 역시 다음의 두 가지 **'투자 철학의 DNA'**만큼은 흔들림 없이 간직한 채,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유연하게 진화를 거듭할 것입니다.

  • Evidence over Ego (얄팍한 자존심보다 객관적인 증거를 우위에 둔다)
  • Purpose over Profit (단순한 맹목적 수익보다 투자의 진정한 목적을 우위에 둔다)

11장부터 98장까지 비어 있는 수많은 챕터들은, 앞으로 시장이 저에게 던질 가혹한 선택압과 그에 맞서 이 두 가지 DNA를 지키며 제가 써 내려갈 새로운 생존의 기록을 위해 남겨둔 여백입니다.


5. 1부의 끝, 그리고 폭풍을 건너는 '거시경제 생존기'

"시장이 흔들릴 때, 나를 원칙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묵직한 질문에 대한 저만의 첫 번째 대답이 바로 지금까지 1부에서 치열하게 쌓아 올린 **'진화형 코어(VOO, SCHD, SPMO)'**였습니다. 저라는 나약한 인간이 거대한 시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제 발목을 단단히 묶어둘 무거운 뗏목을 짜맞추는 과정이 바로 1부의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뗏목에는 뼈아픈 한계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사후 확증 편향(Look-ahead bias)'의 함정입니다. SCHD의 지수 규칙(배당 지속성, 재무 지표 등)은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계됐습니다. 특정 과거 위기의 취약점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됐더라도, 같은 규칙이 미래의 새로운 위기에서 손실을 막아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를 시스템 소프트웨어(System SW)의 세계에 빗대어 보겠습니다. 시스템 최적화를 담당하는 **'가버너(Governor)'**는 최근의 과거 상태를 담은 '필터 윈도우(Filter window)'를 보고 다음 동작을 결정합니다. 이는 *"가까운 미래는 최근의 과거와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시간적 지역성(Time Locality)'**을 전제로 하는 기법입니다. 하지만 만약 시스템에 갑작스럽고 극단적인 부하(변화)가 닥쳐서 이 시간적 지역성이 깨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거만 바라보던 가버너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엄청난 성능 저하와 전력(Power) 손실을 일으키고 맙니다.

팩터 ETF도 과거 데이터에서 정의한 지표와 규칙을 사용합니다. 과거와 비슷한 관계가 이어질 때는 의도한 노출을 제공할 수 있지만, 초인플레이션, 통화 체제 변화, 급격한 금리 인상처럼 기존 관계를 흔드는 충격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뗏목을 만들었다고 해서 결코 항해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뗏목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위대한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뗏목 위에 올라타서 끝을 알 수 없는 거시경제의 폭풍을 직접 건너는 일입니다.

  • 폭락의 공포와 벼락거지의 탐욕 앞에서, 뗏목(포트폴리오)을 쥐고 있는 '나약한 감정'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 내 삶을 매일 시장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자동 매수(DCA & KCA)' 시스템을 어떻게 내 일상에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
  • 거대한 위기와 붕괴가 덮칠 때마다 부서지기는커녕, 오히려 폭풍을 거름 삼아 더 단단해지는 '안티프래질(Antifragile)'의 경지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1부에서 찾은 훌륭한 도구들을 넘어, **이 도구들을 요동침 없이 움직이는 '운영체제(OS)'와 '마인드셋'**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단순한 종목 추천이나 100% 수익을 보장하는 비법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조금씩 높여가는 어느 엔지니어의 겸허한 생존 기록.

그 진짜 항해는 텅 빈 챕터들을 잠시 미뤄두고 **2부 『거시경제 생존기』**에서 담담하게 이어가 보겠습니다.

부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각자의 원칙이라는 북극성을 찾으시기를. 그리고 어떤 거친 파도 앞에서도 기꺼이 '항로를 유지(Stay the Course)'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