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경제 생존기 1장] 한국의 저성장을 예상했지만, 시장의 시간은 달랐다

한국의 저성장을 전제로 한 선택
RISE KIS국고채30년Enhanced를 매수할 때 저는 한국의 미래 성장률이 미국보다 낮아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상품은 한국 정부가 발행한 30년 만기 국고채에 투자하는 ETF입니다.
과거의 한국은 놀라운 고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같은 속도로 달릴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성장 동력이 약해지면 한국 경제는 미국보다 먼저 둔화되고, 한국은행도 연방준비제도보다 먼저 금리를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가설은 간단했습니다.
한국의 성장 둔화 → 미국보다 빠른 기준금리 인하 → 한국 장기금리 하락 → 30년 국고채 가격 상승
한국의 장기 성장에 대한 비관을 채권의 자본 차익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논리가 단순하고 분명해 보였기에 그 사이에 빠진 조건들을 충분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Enhanced’라는 작은 단어를 가볍게 보았다
30년 국고채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금리가 내려갈 때 만기가 긴 채권일수록 가격이 크게 오르기 때문입니다.
채권 가격은 시장금리와 반대로 움직입니다. 새로 발행되는 채권이 더 높은 이자를 주면, 과거의 낮은 이자를 주는 채권은 가격을 낮춰야 팔립니다. 반대로 시장금리가 내려가면 기존의 높은 금리를 가진 채권의 가치는 올라갑니다.
이때 금리 변화에 가격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개념이 듀레이션(Duration)입니다. 듀레이션이 길수록 금리 하락의 수혜도 커지지만, 금리 상승의 충격도 커집니다.
제가 고른 상품에는 지렛대가 하나 더 숨어 있었습니다. 상품명 뒤의 ‘Enhanced’는 이 ETF가 국내 30년 국고채 세 종목을 담고, 전체의 30% 규모로 자금을 추가 차입해 같은 채권을 더 매수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금리가 내려가면 일반 장기채보다 더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금리가 오르면 손실도 커집니다.
당시에는 레버리지 상품을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0년이라는 긴 듀레이션이 이미 첫 번째 지렛대였고, Enhanced 구조는 그 위에 올려진 두 번째 지렛대였습니다.
성장률은 낮아졌지만 금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제 생각에서 가장 큰 오류는 “성장이 둔화되면 곧 금리를 내릴 것”이라고 단순화한 데 있었습니다.
2022년 한국 경제의 하방 위험은 실제로 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가는 그보다 더 급한 문제였습니다. 한국은행은 성장률이 낮아질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물가가 목표 수준을 크게 웃돌고 있었기 때문에 금리를 계속 올렸습니다. 2022년 11월 기준금리는 3.25%까지 올라갔습니다.
성장 둔화와 금리 인하 사이에는 제가 생략한 변수들이 있었습니다. 물가가 높으면 경기가 둔화되어도 중앙은행은 쉽게 금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원화 약세와 미국의 가파른 금리 인상, 금융 안정과 가계부채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저는 한국과 미국의 장기 성장률을 비교했습니다. 하지만 채권 가격은 먼 미래의 성장률 전망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당장 눈앞의 물가와 환율, 중앙은행의 선택이 먼저 가격에 반영되었습니다.
저는 먼 미래의 목적지만 보았고, 시장은 당장의 물가와 환율에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세 상품에 담긴 하나의 베팅
당시 제 계좌에는 한국 30년 국고채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미국 투자등급 채권시장 전반을 담는 BND와 투자등급 회사채 ETF LQD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종합채권, 미국 회사채, 한국 국고채. 이름도 다르고 국가와 발행자도 달랐으므로 충분히 분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22년이 되자 세 상품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 BND의 2022년 총수익률은 약 -13.1%였습니다.
- LQD의 2022년 총수익률은 약 -18.0%였습니다.
- 긴 듀레이션과 추가 차입 구조를 가진 한국 30년 국고채 ETF도 금리 상승의 충격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제야 상품 이름 아래에 숨어 있던 공통점을 보았습니다. BND에는 중간 수준의 듀레이션이 있었고, LQD에는 더 긴 듀레이션과 기업 신용 위험이 있었습니다. 한국 30년 국고채에는 훨씬 긴 듀레이션과 Enhanced 구조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세 상품에 나누어 투자했지만 모두 “금리가 크게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의 가설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상품만 나눴을 뿐 위험은 분산하지 못했습니다.
포트폴리오를 나눈 뒤에는 각 종목을 동시에 무너뜨릴 공통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틀린 전망보다 너무 이른 전망이 더 오래 아프다
한국의 성장 동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반드시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물가가 안정되고 성장이 둔화되면 한국은행은 금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때 장기금리가 하락한다면 30년 국고채 가격도 상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에서 ‘언젠가’는 충분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금리가 내려가는 최종 방향을 맞혀도, 그 전에 금리가 더 오르면 장기채는 큰 손실을 입습니다. 투자 가설이 현실이 될 때까지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동안의 하락을 감당하지 못해 포지션을 정리한다면, 나중에 전망이 맞더라도 그 수익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목적지만 생각했습니다. 그곳까지 가는 경로와 비용, 제가 견뎌야 할 시간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한 전망도 견딜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습니다.
먼저 기다릴 수 있는 자리로 물러났다
2022년의 실패를 겪으며 채권의 안전을 둘로 나눠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가 원금을 갚을 것인가라는 신용의 안전과, 제가 보유한 동안 시장가격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인가라는 가격의 안전입니다.
장기 국채는 신용 면에서 안전할 수 있지만, 긴 듀레이션 때문에 가격은 매우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신용 위험이 낮은 자산이면서 동시에 가까운 미래의 생활비를 지켜줄 안정적인 자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 종류의 안전을 하나로 착각했습니다.
금리가 계속 오르는 동안 듀레이션을 더 늘릴 때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다음 판단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장기채에서 시선을 돌려 SGOV, CD금리 ETF, CMA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자본 차익 대신 짧은 만기와 빠르게 높아지는 이자를 선택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투자로 여기지 않았던 현금이 제 계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