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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경제 생존기 2장] 현금으로 물러나서야 기다림의 가치를 알았다 ​

SGOV와 CD금리 ETF, CMA 자금을 주차하듯 나누어 둔 현금의 주차장

손실을 인정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

2022년의 저는 채권을 들고 있으면서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BND와 LQD, 한국 30년 국고채는 서로 다른 상품처럼 보였지만 모두 금리 상승에 취약했습니다. 특히 긴 듀레이션에 추가 차입 구조까지 더해진 장기 국고채는, 제가 예상한 방향이 현실이 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성장이 둔화되고 물가가 안정되면 언젠가 금리는 내려갈 것이고, 장기채 가격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맞을 수 있는 전망과 지금 견딜 수 있는 포지션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금리가 얼마나 더 오를지 알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가격이 얼마나 더 하락할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손실을 견디느라 매일 금리와 환율을 확인하는 상태는 제가 원했던 안전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는 장기채 비중을 줄이고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그 결정에는 특별한 통찰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손실을 인정하고, 제가 시장의 순서를 맞힐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후퇴한 자리에서 그동안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산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현금이었습니다.


현금을 들고 있는 사람은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

오랫동안 현금은 게으른 자산처럼 보였습니다.

주식이 오르면 수익을 놓치고, 물가가 오르면 구매력이 줄어듭니다. 투자 커뮤니티에서는 현금을 오래 보유하는 것을 시장에 참여할 용기가 없거나 매수 시점을 재는 행동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계좌에 놀고 있는 돈을 보면 어떻게든 더 높은 수익을 내는 상품에 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022년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연방준비제도는 2022년 3월 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2023년 7월에는 연방기금금리 목표 범위를 5.25~5.50%까지 올렸습니다. 장기채 가격을 짓누른 바로 그 금리 상승이, 반대편에서는 짧은 만기의 채권과 현금성 상품이 받을 수 있는 이자를 빠르게 높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돈을 오래 빌려줄수록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만기가 길수록 그동안 물가와 금리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단기간에 기준금리를 올리자 단기금리가 장기금리보다 높아지는 장단기 금리 역전이 나타났습니다. 몇 달만 빌려주고 돌려받는 미국 국채가, 더 오랜 시간 가격 변동을 감수해야 하는 장기채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구간이 열린 것입니다.

제가 장기채에서 기대했던 것은 금리 하락에 따른 큰 자본 차익이었습니다. 반면 초단기채가 건넨 것은 훨씬 소박했습니다.

큰 수익을 약속하지 않는 대신, 가까운 미래의 가격을 예측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었습니다.

같은 금리 상승도 자산의 만기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달러는 SGOV에서 기다리게 했다 ​

먼저 달러 자금을 기다리게 할 곳으로 선택한 것은 SGOV였습니다.

SGOV는 만기가 3개월 이하인 미국 재무부 단기국채에 투자하는 ETF입니다. 20년이나 30년 뒤에 원금을 돌려받는 장기채와 달리, 보유 채권이 곧 만기를 맞고 그때의 금리로 다시 투자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금리가 빠르게 오를 때 매우 중요했습니다.

장기채는 과거의 낮은 금리가 오랫동안 고정되어 있으므로 새로 발행되는 고금리 채권과 경쟁하려면 가격이 크게 내려가야 합니다. 반면 초단기채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만기가 돌아옵니다. 금리가 오르더라도 곧 더 높은 금리의 새 단기채로 갈아탈 수 있기 때문에 금리 변화에 따른 가격 충격이 훨씬 작습니다.

SGOV의 운용사도 이 상품을 자본 보전과 유동성 관리에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설명하며, 분배금은 매월 지급합니다. 실제로 2022년 초 거의 보이지 않던 초단기 국채 수익률은 연준의 인상과 함께 올라 2023년 중반에는 5% 안팎에 도달했습니다.

저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숫자의 크기보다 기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장기채를 보유할 때는 금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계좌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SGOV에서는 가격 변화를 맞히려 애쓰기보다 매달 쌓이는 이자를 받으며 다음 결정을 미룰 수 있었습니다. 달러로 투자할 기회가 오기 전까지 자금을 세워둘 장소가 생긴 것입니다.

물론 SGOV가 달러 예금처럼 완전히 고정된 상품은 아닙니다. ETF이므로 시장가격과 순자산가치가 조금씩 움직이고, 비용과 매매 스프레드가 있습니다. 원화로 성과를 계산하는 투자자에게는 환율 변동도 남습니다.

다만 제가 30년 국고채에서 감당했던 위험과 비교하면 그 성격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장기적인 금리 방향에 대한 베팅을 거의 걷어내고, 미국 정부의 매우 짧은 만기 채권에서 나오는 이자를 받는 구조였습니다.


원화에는 CD금리 ETF라는 주차 공간이 생겼다 ​

달러만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내 주식계좌와 연금계좌에도 아직 투자처를 정하지 못한 원화가 있었습니다. 은행 예금에 넣으면 만기까지 자금이 묶이고,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예수금으로 두면 이자를 거의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사이를 채워준 것이 CD금리 ETF였습니다.

CD는 은행이 단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양도성예금증서입니다. 국내의 CD금리 ETF는 주로 91일물 CD금리를 기초로 만든 지수의 일별 수익률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운용됩니다. 금리가 하루 단위로 누적되므로 가격 그래프는 큰 등락보다 완만한 계단에 가까웠습니다.

필요할 때 거래소에서 매도할 수 있고, 쉬는 동안에도 단기금리에 가까운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매수할 주식이 아직 없거나 시장의 방향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원화를 예수금으로 방치하지 않고 잠시 주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름에 ‘CD’가 들어간다고 해서 은행의 정기예금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ETF는 거래 가격이 순자산가치와 달라질 수 있고, 상품에 따라 스왑 같은 장외파생상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거래상대방의 신용 위험도 생깁니다. 매매 수수료와 보수, 세금, 짧은 보유 기간의 비용까지 고려하면 표시된 금리를 그대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얻은 것은 원금 보장이라는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긴 듀레이션을 지지 않으면서 원화의 대기 시간을 이자로 바꾸는 도구였습니다.


CMA는 자투리 현금이 아니라 유동성의 자리였다 ​

SGOV와 CD금리 ETF에 넣기에는 너무 짧게 사용할 돈도 있었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체하거나, 갑자기 생긴 기회에 바로 투입해야 하는 자금입니다.

그 돈은 CMA와 MMF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CMA는 계좌에 들어온 돈을 RP나 MMF 같은 단기금융상품에 자동으로 운용해 수익을 돌려주는 구조입니다. MMF 역시 국공채와 CD, 기업어음 등 만기가 짧은 금융상품에 투자합니다. 큰 수익을 내기 위한 상품이라기보다 돈을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유동성을 유지하면서 짧은 금리를 받는 자리였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에 남은 돈을 ‘자투리 현금’이라고 불렀습니다. 투자되지 못한 불완전한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폭락장에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현금은 자투리가 아니었습니다. 생활비나 예정된 지출 때문에 손실 난 자산을 팔지 않게 해주고, 좋은 가격이 왔을 때 기존 자산을 처분하지 않고 매수할 수 있게 해주는 선택권이었습니다.

CMA와 MMF 역시 은행 예금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예금자보호 대상이 아니며, 운용 방식에 따라 손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품별로 RP형인지 MMF형인지, 적용 수익률과 출금 조건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안전하다는 말 대신, 저는 그 돈의 목적을 먼저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 당장 생활과 지출에 사용할 돈은 유동성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 국내 투자 기회를 기다리는 원화는 짧은 시장금리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 미국 자산에 다시 투입할 달러는 초단기 미국 국채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같은 현금처럼 보여도 통화와 사용 시점, 다음 목적지에 따라 머물 곳은 달라졌습니다.


현금은 수익률이 아니라 시간을 벌어주었다 ​

장기채를 들고 있을 때 저는 매일 정답을 요구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물가가 언제 꺾일지, 중앙은행이 언제 멈출지, 장기금리가 어디까지 오를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시장이 제 예상과 반대로 움직이는 하루하루가 손실로 기록되었습니다.

초단기 자산으로 물러난 뒤에는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당장 금리의 꼭대기를 맞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금리가 더 오르면 새로 편입되는 단기채의 이자도 뒤따라 올라갔습니다. 금리가 높은 상태로 오래 머물면 그 기간만큼 이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현금성 자산은 주식과 장기채보다 높은 장기 수익률을 만들어주는 해답이 아닙니다. 물가를 이기지 못할 때도 있고, 자산 가격이 빠르게 반등하면 상승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머물 집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시의 저에게는 가장 필요한 자산이었습니다.

현금은 투자를 포기한 상태가 아니라, 틀린 전망을 멈추고 다음 판단을 내릴 시간을 사는 자산이었습니다.

2022년을 지나며 저는 수익을 내는 것만큼 판단을 유예하는 능력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를 때 매수를 미룰 수 있고, 그 기다림에도 작은 이자가 붙는다는 것은 제게 필요한 여유였습니다.


기다릴 수 있게 되자 다시 예측하고 싶어졌다 ​

문제는 사람이 평온에 금방 익숙해진다는 데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물가 상승률은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도 느려졌습니다. 시장에서는 곧 긴축이 끝나고 다음 단계는 금리 인하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커졌습니다.

그 순간 초단기채의 장점은 제 눈에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금리가 내려가면 SGOV가 지급하는 이자도 낮아집니다. 반대로 TLT나 EDV처럼 듀레이션이 긴 채권은 금리 하락의 수혜를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기다리는 동안 금리의 정점을 놓치면, 장기채의 가장 큰 상승 구간에 올라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현금은 제게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시간을 겸손해지는 데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장의 방향을 맞힐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초단기 자산에서 나와 TLT와 제로쿠폰 장기채 EDV로 이동한 과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기다릴 수 있게 된 제가 왜 다시 금리의 정점을 서둘러 판단했는지도 함께 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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